에버소울)여명을 향하여

“이제 다 끝났어, 케이린. 이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어.”

연설대에 오르기 전, 나는 케이린에게 눈빛을 보냈다.

케이린은 그동안의 씁쓸한 여정과 우리에 대한 미안함이 가시지 않은 듯 구슬픈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케이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숨을 가다듬고 정령들이 지켜보는 연설대로 올라갔다.

“이제 10년간 지속되어 온 이 거대한 음모는 끝이 났다!”

“여왕 유리아의 재 악령화,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이 에덴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그 일련의 모든 고대 악들의 음모가 드디어 오늘부로 종지부를 맻었다!”

“그러나, 이 업적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연설대에서 뒤돌아 메피로부터 헌화를 받아 10년간 이어진 일련의 전쟁과

사건의 참화속에 희생된 모든 정령들을 기리는 석고상의 앞에 꽃을 놓고서 말을 이었다.

“수 없는 시간속에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뒤이어 더 이상 이 일로 고통받을 이들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나

지나간 시간속에 잠든 이들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더 오래걸릴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어리석은 이들에 의해 이 간신히 손에 얻은 평화는 깨어질 것인가!”

나는 잠시 정적을 취했고, 수 없는 정령들 또한 침묵을 지켰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마지막으로 연설문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언젠가 깨어나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그 정령들과 또 남아있을지 모르는 인간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금 야욕에 희생되지 않을 그 때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는 평화를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아가 아폴리온으로 타락하게 된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난 그 때 모든 것이 끝났을때부터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

케이린이 다스리고 있다고 블러핑을 했던 9호의 인류는, 지나친 DNA의 변질로 인하여 인류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벨레드의 방주에 타고 있던 이들은 저 머나먼 은하 반대쪽 행성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내 시간으로

계산하자면 데려오는 데에 100년이나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그쪽에서 평화를 이루고 살아갈 이들을 강제로 에덴으로 귀환시키고 싶지 않았다.

1호, 5호, 9호. 에덴으로 돌아왔던 이 세 방주를 제외한 나머지 방주를 나는 노쇠한 인간이 될 때까지

애타게 모두와 함께 찾으려고 했으나 끝끝내 찾지 못했다.

연설날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지금쯤이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부모님과 친구들 모두 노환으로 그 세상에 없을 것이다.

물론 메피와 벨레드, 릴리트의 힘을 합치면 과거의 인연들이 정상적으로 살아있는 과거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케이린의 소환 후폭풍을 돌이킬 때마다 난 그 긴 시간동안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나노머신을 선천적으로 주입받고, 내 후대에 초능력을 각성한 초인류인 케이린과는 달리

나는 일면부지 없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50년의 세월동안 천천히 세월의 흐름을 맞으면서 늙어갔다.

케이린은 처음엔 새침하게 놀려댔지만 날이 갈수록 후대의 인간의 백살이 넘어야

겨우 나타나는 모습을 내가 70이 되어 세월의 풍파를 전면으로 맞아버리자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되었다.

정령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령은 대체적으로 몇백년이 지나지 않는 이상 중년 이상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고들 했다.

그걸 처음에 들은지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잊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내 기력과 정신력은 쇠퇴하기만 하니 다들 안타까운 모습이 역력했다.

어느 날, 나는 이제 삶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점차 정령들과 케이린을 덜 만나고자 했다.

다들 왜 갑자기 만남을 꺼려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는 미안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단지 혼자 있고 싶다고만 말했다.

며칠 후, 정령 아이들이 내게 가상현실 기기를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노안이 왔으니 그런 기기를 낄 여력이 없다고 했지만 이 기기는 수 없는

나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함께 모여 만든 걸작이라서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의 결심이 들었을 때, 이 기기를 작동시켜달라고 했다.

약 한달 뒤, 나는 이제 그만 아이들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가상현실 기기를 작동시키게 되었다.

가상현실에 들어가자 내 몸이 너무나도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아케나인의 영지를 다스릴때와 너무나도 똑같은 종달새 숲이였다.

나는 이 사실에 놀라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샘물을 발견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세계에서 내가 에덴에 처음 왔던 때의 그 젊은 내 자신이 되어있었다.

나의 눈망울에 눈물이 맻히기 시작하며 그동안의 추억들과 더는 추억속에서 밖에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수 없는 위험에서 에덴을 구하고, 정령들을 구하고, 누구나 실패한다고 다독여주던 그 젊은 영웅은,

그 누구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말처럼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있던 것이다.

그렇게나 뜨거운 눈물이 내 눈을 타고 뺨을 흘러 바닥에 떨어지고 있던 그 순간, 내 뒤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왔다.

“구원자님...”

메피였다. 나를 이 에덴으로 부른 아이. 감정이라는 것을 몰라 내게 연신 물어봤던 아이.

방주를 몰고 돌아오겠다던 아이. 그리고.. 마침내 재회하여 몇십년간이나 함께해주었던 아이...

“다른 분들은, 차마 구원자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해서 가상세계 밖에서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으세요.”

나는 메피가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메피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메피는 그런 나의 머리를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메피... 미안해...”

나는 연신 메피에게 미안하다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메피는 괜찮아요, 라고 속삭이며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나... 너희들에게 정말로 해준게 없는데...”

“아뇨... 구원자님은 정말로 많은 일을 해주셨어요.”

“너희들에게, 나는 멋진 구원자였을까?”

“물론이에요.”

“나도, 나도... 너희들을 만나서 정말로 기뻤어...”

내가 이 말을 하자, 메피도 참아왔던 눈물을 조금씩 흘리며 말했다.

“그말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너희들을 돌보는게... 내 사명이였어.”

“서로... 돌보기로 했었죠. 그래왔구요...!”

메피의 말을 듣자, 손끝의 촉감이 점차 사라지며 졸려옴을 느꼈다.

나는 메피에게 피곤해서 자야하니 마지막으로 무릎배게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메피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바람이 수풀을 가르는 소리,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

이 가상공간의 모든 것들이 그저 나를 위해 존재하는것만 같았다.

“메피...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구원자님. 감사했어요.”

“응.. 나두.”

과거로부터 소환되어 얼떨결에 구원자라는 직책을 받은 구원자는 생에 제일로 달콤한

기나긴 꿈을 꾸기 위해 잠에 들었다.

당신이 영원히 잠든 후, 생존한 인류는 에덴으로 귀환했다.

처음부터 당신과 나, 케이린이 대화를 나누어 오해를 풀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제 당신은 에덴과 하나가 되었다. 당신의 뼈와 살, 그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당신의 영혼은 살아남아 에덴의 영원한 수호자(에버소울)이 되었다.

당신의 유산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구원자의 장례식이 끝난 후, 아케나인 장 내에는 신기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케이린이 마물을 만들기를 그만 둔 후에도 에덴에는 악한 사념이 깃들어 마물이 계속 출현하곤 했는데

위기에 빠진 이들을 홀연 듯이 구하고 사라지는 흰색 옷의 소년이 있다는 것.

그 소년이 어느 정령인지는 그 누구도 끝끝내 알지 못했다.

뜬 소문일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